제목 | [Essay] 나의 노트_ 진석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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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15-12-24 18:48:34 | 조회수 | 90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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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노트]
진석현 ㅣ 설계2부문
Thoughts have to be translated to be shared. It is language that enables us to comprehend our thoughts as well as those of others. Language is an all-encompassing word used to describe the process of communication. Notation is my language, the white page is the proscenium where the hand aided by a pen/pencil reenacts my ideas.
생각이 공유되기 위해서는 해석되어야 한다. 우리 자신의 생각과 다른 이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언어다. 언어란 소통의 과정을 표현하는 아주 포괄적인 단어다. 손으로 쓰는 메모는 나의 언어이며, 이때 흰 종이는 손이 펜과 연필의 도움을 받아 내 생각을 재연해내는 무대 proscenium이다.
-Peter Winston Ferretto, 『건축가의 노트』 발췌-
나의 무대인 흰 종이, 기록의 시작
처음 노트를 시작한 건 건축을 처음 접한 대학시절이었다. 언제나 무지노트를 가지고 다녔는데 스케치를 하기 위해서였다. 줄이 있는 노트는 그 위에 그려진 스케치의 이해를 방해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스케치를 할 때 줄에 생각이 갇힌다는 느낌이 강해서 무지노트만 고집해왔다.
간삼에 입사할 때도 여지없이 하얀 무지노트를 준비했다. 건축에서 의사소통을 하기에 스케치만큼 좋은 수단은 없기 때문에 무지노트를 요긴하게 사용해왔다. 노트로 내가 하는 중요한 것 중 또 하나는 그림 그리기다. 낙서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얀 빈 종이를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심지어 설레인다. 이렇게 어느덧 간삼에서 사용한 노트가 20권에 달한다. 노트 안에는 급하게 갈겨 쓴 회의록, 처리해야 할 일의 목록 등 딱딱한 내용이 대부분이지만 이켠저켠에 재미있고 엉뚱하기도 한 그림과 낙서들이 곁들어 있다. 간삼 입사 만 10년을 핑계로 내 노트 속을 들춰보기로 한다.
△10년간 수집한 20여권의 노트
20여권의 노트에는..
노트의 80퍼센트는 업무관련 내용이다. 프로젝트 관련사와의 협의내용, 회의록, 일정관리를 위한 사무적인 메모들과 디자인 및 기술적인 개념을 정리하기 위한 스케치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머지 20퍼센트는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를 스케치하거나 지루한 회의 시간을 이용한 낙서 등이다.
나의 일정관리
다이어리형 노트가 아닌 무지노트를 업무에 사용했을 때 단점은 달력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 단점을 일정관리가 필요할 때마다 달력을 직접 손으로 그려서 해결했다. 내가 원하는 기간, 모양, 크기의 달력을 이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상황에 따라 토,일요일을 표기하기도 하고 생략할 수도 있다. 장점은 프로젝트 또는 주제별 일정관리가 가능하고 단점은 시간이 지나면 달력이 노트 여기저기에 파편화되어 찾기도 힘들고 장기간의 일정을 한 눈에 파악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나의 회의록
발주처가 참석한 주요회의를 다녀온 후 회의록 작성은 필수다. 회의에 참석하면 회의의 중요도에 따라 녹음을 하는 방법도 있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회의록에 넣어야 할 중요한 내용만 파악해서 메모해 놓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 그 말을 했는지 표시한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이 꽤 많고 참석자들이 처음 보는 사람일 때는 참 난감하다. 특히 프로젝트에 관련해서 이해관계가 다른 단체들이 모였을 때 누가 어떤 말을 했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이럴 때 나는 가로세로 방향구분이 없는 무지노트의 장점을 살려서 노트를 가로로 길게 놓고 사람들이 앉아있는 모양대로 커다랗게 좌석배치를 그린다. 그리고 그 좌석에 앉는 사람이 한 말을 좌석모양 근처에 메모해 놓는다. 나중에 회의가 끝나고 그 좌석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명패를 확인하거나 회의 주최자에게 물어본다.
나의 PT 준비
팀원 때까지는 주어진 분량의 PPT를 만드는 일을 했다고 한다면 부팀장, 팀장이 되어 책임과 권한이 생기게 되면 PT에 어떤 내용을 넣고 어떻게 구성할까가 중요 고민거리가 된다. 디자인과 표현기법 등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끝맺을까의 스토리 구성이 PT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PT의 구성에 공을 많이 들인다. PT 구성도 내 노트에서 이루어진다. 손으로 사각형을 그리고 그 사각형 안에 스토리를 채워나간다. 어떻게 보면 드라마나 광고의 콘티를 짜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내용을 채워 넣는 사각형은 구상 초기에는 작게 그려서 전체 스토리를 한 눈에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스토리가 구체화될수록 크게 그려서 세부 내용까지 표현하는 단계까지 간다.
나의 개념정리
건축디자인, 형태, 컨셉 등을 구상할 때는 주로 트레이싱 페이퍼를 이용하는데 생각의 끊임없이 스케치를 이어나가기에 좋기 때문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생각을 놀 수 있게 해주는 곳이 트레이싱 페이퍼라고 한다면 변하지 않는 개념을 정리해서 내 머릿속에 콕 박아 놓고 싶을 때는 나의 노트를 이용한다.
나의 아이디어
건축을 하다보면 가끔씩 재미있는 생각들이 떠오른다. 대체로 다 뜬금없고 황당한 생각들이다. 사람들이 모두 날아다닐 수 있다면 건축은 어떻게 변할까? 건물 안에 물을 꽉 채운다면? 내 걸음걸이 모션을 3D 캡쳐 해 내 몸이 지나가는 공간만 보이드된 나만의 입구 통로를 만들면 어떨까? 이런 꿈 같은 생각들이나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노트에 스케치로 남겨놓는데 아래 그림이 그들이다. 층간 소음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윗집에서 내는 소음이 일정 수준을 넘으면 아랫집에 설치된 단추가 활성화 되고 단추를 누르면 슬래브가 투명하게 되어 범인(?)과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시스템, 도시에 내리는 비를 공원이나 농장 등 필요한 곳으로 분배해 주는 시스템, 중력발생기를 이용한 층 구분이 없는 건물, 서서 가는 콩나무 시루 지하철이라면 차라리 누워가자는 아이디어 등이다.
나의 낙서
아이디어와 창의성, 디자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축설계사무소이지만 역시나 하나의 거대한 조직이고 회사이기에 지루한 발표와 회의들이 없을 수는 없다. 그리고 사내 강연, 세미나를 들을 때엔 손이 꽤 심심하다. 그럴 때는 귀는 바깥을 향해 열어두고 손으로는 펜을 들어 낙서를 한다. 그림을 그릴 때 나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쯤에 서 있다. 생각과 의식의 흐름에 펜을 맡긴다. 그래서 애초에 생각한 밑그림도 없고 계획도 없다. 단지 ‘네가 가진 게 뭐니’라고 내가 나에게 묻는다. 그림은 대부분 사람과 얼굴의 형체다. 이것들을 주로 그리는 이유랄 것은 없고, 대학생 때까지는 ‘내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선’을 좇아서 형태가 없는 추상적인 무늬들을 수없이 그려내었다. 그때의 흔적들이 지금의 그림에도 부분적인 패턴으로 남아있다.
그림들은 눈,코,입,귀,손,발 등 신체 주요 부위를 뒤섞고 반복함으로써 신체에 대한 고정관념을 깬다. 그림을 재미있게 보는 방법은 그림에 숨어 있는 눈,코,입,귀,손,발 등을 찾으면서 보는 것이다. 고정관념을 깬다고 해놓고서는 아이러니하게 손가락, 발가락은 꼭 5개를 고집하는 건 나도 왜인지 잘 모르겠다. 이렇게 그린 그림에는 건축을 하는 사람의 일종의 직업의식(?) 또는 강박감이 드러난다. 가능하면 통일하려고 하고 반복시키려 하며 심심하지 않도록 포인트 주어 강조한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즐겁기 보다는 오히려 괴로움에 조금 더 가깝다. 영감은 무한하지 않고 시간에 따라 샘물처럼 나온다. 이것을 모아 연료처럼 소비해 그림을 그려낸다. 그리고 다 써버리면 다시 채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욕심을 내서 그린다고 해도 마음에 드는 그림은 나오지 않는다.
△그림을 모아 편집, 제본한 책<눈코입귀몸손발>
에필로그
노트 중 그림이 쌓이면서 그것을 한데 모아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1년 전쯤 아내의 권유로 노트에 흩어져 있던 그림들을 한데 모아 책을 만들었다. 책의 이름은 눈․코․입․귀․몸․손․발이다. 가로세로 15cm, 100페이지 분량이다. 책은 직접 스캔해서 용지에 출력 후 직접 제본한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책이다.
글을 쓰기 위해 20여권의 노트를 책상 아래 박스에서 꺼내 다시 훑어보았다. 간삼에서 지난 10년 간 무얼 했고 무얼 생각했었는지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커다란 건물도 결국에는 작은 아이디어에서 출발한다. 거창하진 않지만 생각의 씨앗들을 모아놓은 노트를 앞으로도 계속할 생각이다. 노트하지 않으면 사라지기 때문이다.
Share는 간삼인들의 자유로운 발상을 통해 건축에 담긴 다양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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